임원 명함을 내려놓던 날
'명함'
실제로 나의 경험을 토로하면서 같은 공감대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들어가며
퇴직이라는 현실을 내면적으로 인정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고요. 그런데 실제로 맞닥뜨린 현실은 출근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죠.
사실 다음 날 출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은 상당히 허전하게 다가오고, 당혹감마저 느껴지더라고요. 그렇다고 뾰족한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적 환경이 야속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제는 나의 명함에서 표현되는 다양한 직위나 직무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런데 명함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나의 인생을 보여주고 대변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사무실을 나왔을 때 제일 나중에 챙겨서 나온 책자는 수많은 명함책자들이었고, 잠깐 동안이라도 그 명함들을 훑어보면서 지나온 시간을 회상하는 시간이었지요. 회환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미국계, 독일계, 영국계 다시 미국계 및 국내 회사 등등...
사실 36년 동안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저는 수없이 많은 명함을 주고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이름 대신, 명함에 쓰여 있는 직위가 나를 대변하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었기도 하였습니다. 저를 이름보다 직함으로 더 많이 기억했지요. 회사명과 직위가 적혀 있는 작은 종이 한 장.
수십 권의 명함첩들을 보면, 국내 기업의 대표들, 수많은 언더라이터, 영업직원, 해외 파트너들, 손해사정사, 브로커, 재보험 관계자들, 그리고 오랜 기간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명함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회사 임원으로서의 명함이 생각보다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 명함이 믿음의 상징이었고, 회사를 대변하는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상징이었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퇴직이라는 커다란 변화 앞에 과연 이 명함들의 주인공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만나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니 가슴이 답답하다고 느꼈습니다.
명함 속 이름들은 그대로인데,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들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왜 명함을 내려놓기 힘든가
이제는 압니다. 명함은 연락처가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보여주는 증표였다는 사실을요. 그러나 이제는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이제 과거가 되어 버린 시점에서 회사 이름이 사라지고 직함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사실 가장 솔직한 마음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업계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여러 회사와 거래 관계도 잘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마켓에서는 제 이름을 아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나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풍문도 있었지요.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 평가의 상당 부분은 개인의 능력만이 아니라 회사라는 조직과 직위가 함께 만들어 준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한동안 회사의 명함을 몇 장 지갑에 넣어두고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나 이런 경력의 소유자야'라고 으시대려고 하는 마음도 있었고 당연히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퇴직후에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제도 덕분에, 노동부 등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는데 나의 그런 행동이 다 부질없고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오히려 창피하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과감하게 명함을 내려놓았지만 사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종이 한 장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오랫동안 익숙했던 정체성을 내려놓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고백할 부분은 현직에 있는 동안 여러해 동안 지금까지 사회에서 받은 은덕과 혜택을 받고 무난하게 사회생활을 마치고 나면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동부 등을 방문하면서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제한될 수밖에 없더라도 과연 어떤 형태로 환원해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방향을 정한 다음부터는 편안하게 명함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퇴직 후 찾아온 정체성의 변화
왜 명함을 내려놓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울까?
직장에 다닐 때는 누군가의 상사였고, 누군가의 고객이었고, 누군가의 의사결정권자였습니다.
하지만 퇴직과 동시에 그런 역할들이 한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퇴직 후 처음 얼마 동안 '나는 이제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명함은 단순한 연락처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회적 증표였습니다.
따라서 명함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단순히 직장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는 그동안 수고했다는 위로를 받고는 있지만 아직도 생생한(?) 나의 신체적 및 정신적 의지로 당장이라도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기도 했지요.
그러나 저는 회사 창립 이래 최초의 정년퇴직이라는 기록을 세우고 싶었고, 그리하여 회사 주관으로 정년퇴임식을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다른 산업으로 어떤 형태로든 일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잘 알다시피 과거의 내 직위와 직무를 고려하면 이제는 절대적으로 비슷한 형태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이제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조건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까지의 사회적 경험을 어느 곳에 어떻게 환원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시기였고, 그런 결정을 내린 다음부터는 더 이상 노동부를 방문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장애 아동센터와 재활원에 후원을 35년 이상 지속해 왔으며, 아쉽게도 퇴직과 동시에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을때 수입의 단절보다 더 큰 마음의 빚이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나의 경험과 능력이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서 최선을 다하여 봉사와 헌신으로 임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퇴직이 남긴 것들
비로소 털어놓을 수 있는 나만의 비밀은 현직에 있을 때 퇴직할 시기에 거래처 또는 비슷한 관련 있는 업계 동료들이 항상 하는 말은 '퇴직하면 같이 하자'고 믿을 수 없는(?) 감언으로 나를 위로하였다는 것이고 나도 어느정도까지는 믿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정년퇴직이라는 틀 안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렵더라고요. 정년이라는 나이는 현실적으로 너무 나이가 많다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 조기 퇴사를 선택하면 된다는 것이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종종 있었지만 나의 경우는 정년퇴직이라는 커다란 명제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나이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게 대두되었다는 것은 솔직히 불쾌하기도 했지만 안 받아들일 수도 없는 초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정년퇴직이전에 미리 준비한다는 차원에서 그리고 결심했던 사회환원의 일환으로 퇴직 후 KOICA에서 일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2~3년 동안 실질적으로 열심히 알아보았으나 화이트칼라로 경력을 마감한 현실에서는 기회가 별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참고적으로 직접 경험한 바로는 제 입장을 고려할 때 필요로하는 분야는 제한되었고, 저개발국가 등에서 필요로 하는 분야는 농업, IT, 의료, 교육, 공무등 기타 다양한 경험을 필요로 하는 분야가 있으나 금융계 경험으로는 그들의 필요성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오히려 그런 기회조차도 주로 교육계, 공무원, IT전문가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현실은 생각보다 더 냉혹합니다. 나의 경력이 아무리 화려해도(?) 나이 든 경력자가 봉사할 수 있는 포지션이나 일자리에 제한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동부등을 다니면서 (사실 구직활동을 해야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기에) 아, 진작부터 생각해 오던 일들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힘써야겠다라는 생각이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분야를 위하여 내 경험과 경력을 쏟아붓을 수 있는 분야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퇴직 후에 걸려 온 전화 한 통
그렇게 저는 오랫동안 제 삶을 대변해 주었던 명함을 내려놓았습니다.
처음에는 상실감이 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습니다.
내가 내려놓아야 했던 것은 명함이 아니라 직함에 대한 집착이었고, 새롭게 찾아야 했던 것은 직위가 아니라 삶의 의미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무렵 예상하지 못했던 한 통의 연락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연락은 퇴직 후의 제 삶을 또 다른 방향으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습니다.
- Always Somewhere -
그맘 이해가 갑니다 전 유통업에 오래 종사했고 사정상 정리해야 했던 그날 이후 첨 한달가량은 행복했으나 지금은 다시 일을하며 감사한 맘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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